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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에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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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레니오 에레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선수 시절에는 센터백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감독으로 활동하며 혁신적인 전술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현대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에서 감독을 맡아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 유러피언 컵, 인터컨티넨탈컵 등 다수의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 '카테나치오' 전술을 발전시켜 '그란데 인테르' 시대를 열었으며, 선수들의 심리적인 면을 관리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으며, 이탈리아 스포츠 기자들로부터 'Il Mago'(마법사)와 'H.H.'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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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에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엘레니오 에레라 (인터 밀란, 1973–74 시즌)
본명엘레니오 에레라 가빌란 (Helenio Herrera Gavilán)
출생일1910년 4월 10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사망일1997년 11월 9일 (87세)
사망지베네치아, 이탈리아
포지션중앙 수비수 (선수 시절)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해당 정보 없음
클럽Roches Noires
감독 경력
감독퓌토, 1944–1945

2. 선수 경력

엘레니오 에레라는 1910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스페인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란시스코는 안달루시아 출신의 망명한 아나키스트였으며 직업은 목수였고, 어머니 마리아 가빌란 마르티네스는 청소부였다.[4] 1920년, 그의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시 프랑스령 모로코였던 카사블랑카로 이주했다. 에레라는 카사블랑카에서 축구 선수로서 경력을 시작했다.[4]

그는 수비수로 활동했으며, 1932년 22세의 나이에 RC 카사블랑카에서 프랑스 본토의 CASG 파리로 이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에레라(또는 "H.H."로 알려진)는 여러 프랑스 클럽에서 활약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스타드 프랑세에서 뛰었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는 FCO 샤를빌 소속이었으며 이 시기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 두 차례 발탁되었다.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엑셀시어 루베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전쟁 기간 동안에는 레드 스타 FC, 스타드 프랑세, EF 파리-카피탈, 그리고 퓌토에서 5년간 선수로 뛰었다. 특히 퓌토에서는 선수 겸 감독직을 맡으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1945년, 35세의 나이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선수 시절에는 프랑스의 여러 클럽에서 뛰었지만, 눈에 띄는 우승 경력을 쌓거나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3. 감독 경력

선수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여러 국가의 리그에서 활동했다. 스타드 프랑쎄 파리,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인테르 밀란, AS 로마 등 다수의 명문 클럽 감독을 역임하며 라리가, 세리에 A, 유러피언컵 등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특히 인테르 밀란 시절에는 카테나치오 전술을 완성하여 '그란데 인테르' 시대를 열었으며[27][26], 스페인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겸임하기도 했다.[5] 그의 감독 경력은 여러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화려한 성공을 거둔 시기로 평가받는다.

3. 1. 초기 경력

1945년 퓌토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한 시즌 후 친정팀인 스타드 프랑쎄 파리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3시즌 동안 팀을 이끌었으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했다.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바야돌리드의 감독을 맡았다. 다음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아 1950년1951년라리가 2연패를 달성하며 감독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떠난 후에는 말라가, 데포르티보 라코루냐, 세비야 FC 등 스페인 내 여러 클럽의 감독직을 차례로 역임했다.

스페인에서 여러 클럽을 거친 에레라는 포르투갈로 건너가 리스본을 연고로 하는 CF 벨레넨스스에서 2년간 감독직을 수행했다.

포르투갈에서 2년간 활동한 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 1958년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레라는 바르셀로나를 이끌고 두 차례의 라리가 우승과 1959년 코파 델 레이 우승, 1960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적인 시기를 보냈다.[5] 하지만 당시 팀의 스타 선수였던 쿠벌러 라슬로와의 불화 등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1960년 바르셀로나를 떠나게 되었다.[5]

3. 2. FC 바르셀로나

포르투갈의 벨레넨스스에서 2년간 감독직을 수행한 후 스페인으로 돌아와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1958년부터 1960년까지 2년 동안 바르셀로나를 이끌면서 두 번의 프리메라리가 우승(1958–59, 1959–60 시즌)과 1959년 코파 델 레이 우승, 1960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달성했다.[5] 그러나 당시 팀의 스타 선수였던 쿠벌러 라슬로와의 불화 등 여러 문제로 인해 1960년 팀을 떠나야 했다.[5]

이후 여러 팀을 거쳐 감독 경력 말년인 1980년 다시 FC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1981년까지 한 시즌 반 동안 팀을 지휘하며 감독 경력을 마무리했다.

3. 3.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그란데 인테르)

산드로 마초라와 1973년 인터 밀란의 에레라


1960년, FC 바르셀로나를 떠난 에레라는 그해 발롱도르 수상자인 루이스 수아레스와 함께 이탈리아인테르 감독으로 부임했다.[5] 그는 카를 라판이 고안한 5-3-2 포메이션 기반의 '베로우'(Verrou, 빗장) 전술을 발전시켜, 수비에 중점을 두면서도 역습에 유연성을 더한 카테나치오 전술을 확립했다.[27][5][26]

에레라가 인테르를 이끈 1960년부터 1968년까지의 8년 동안, 팀은 황금기를 맞이하며 '그란데 인테르'(Grande Inter, 위대한 인테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시기 인테르는 세리에 A 우승 3회(1962-63, 1964-65, 1965-66), 유러피언 컵(챔피언스컵) 2회 연속 우승(1964년, 1965년), 그리고 인터콘티넨털컵 2회 연속 우승(1964년, 1965년)을 차지하며 유럽 최정상의 클럽으로 자리매김했다.[5][6][7][26] 특히, 1940년대 '그란데 토리노'의 핵심 선수였던 발렌티노 마졸라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가 팀의 주요 선수로 활약하며 '그란데 인테르'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인테르 감독 재임 기간 동안 에레라는 클럽팀 감독직과 함께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겸임하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 대표팀 감독(1959년–1962년)과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1966년–1967년, 페루초 발카레지와 2인 체제)을 맡았다.[5]

3. 4. AS 로마와 이후

1968년, 에레라는 AS 로마로 이적하여 당시 연봉 15만파운드를 받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의 감독이 되었다.[5] 로마에서의 첫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1969년 칼리아리 원정 경기 후 라커룸에서 팀의 중앙 공격수였던 줄리아노 타촐라가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고,[5] 이 일로 당시 구단주 알바로 마르키니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결국 다음 시즌인 1969–70 시즌, 리그 성적이 불안정하자 마르키니 구단주는 에레라를 해임했다.

그는 1973–74 시즌에 인테르에서 1년 동안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후 에레라는 심장마비를 겪었고, 더 이상 풀타임으로 코칭을 원하지 않아 베네치아에서 은퇴하여 남은 생을 보냈다.[5] 1974년부터 1978년까지 활동하지 않다가, 에레라는 1979년에 리미니를 감독하면서 잠시 복귀했고, 1980년과 1981년에는 FC 바르셀로나로 돌아가 한 시즌 반 동안 활동하며 경력을 마무리했다.[5]

3. 5. 국가대표팀 감독 경력

엘레니오 에레라는 클럽팀 감독을 맡으면서 동시에 여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했다. 그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았다. 이후 인테르 밀란 감독 시절에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스페인 대표팀 감독을 겸임했다.[5] 또한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직도 수행했으며[5], 이 시기에는 페루초 발카레지와 함께 2인 감독 체제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4. 전술 및 리더십

엘레니오 에레라는 심리적 동기 부여와 엄격한 규율을 통해 선수단을 관리하는 리더십으로 유명했다.[28][29] 그의 전술은 수비적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풀백(특히 자친토 파케티)을 윙백처럼 활용하여 빠른 역습을 전개하는 등 당시 이탈리아 축구의 일반적인 카테나치오와는 차별점을 보였으며, 스스로도 수비에만 의존한다는 평가를 거부했다.[28][29] 그는 관중을 '12번째 선수'라고 칭하며 팬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28][29]

에레라는 선수 개인이 아닌 팀의 경기력 자체로 주목받은 최초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처럼 스타 선수들이 주목받았던 것과 달리, 1960년대의 인테르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로 불릴 만큼 감독의 존재감이 컸다.[28][29]

2004년, 그의 미망인 피오라 간돌피는 에레라의 공책과 일기에 담긴 스케치와 필기를 모아 Tacalabala|타칼라발라ita라는 책을 출판했다.[28][29]

4. 1. 카테나치오와 혁신적인 전술

엘레니오 에레라는 카테나치오 전술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이를 발전시키고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카테나치오는 방어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카를 라판의 베로우(fra: Verrou) 전술이나 당시 다른 이탈리아 팀들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인테르 시절 에레라 감독의 표준 포메이션은 거의 항상 5-3-2 시스템이었다. 이 포메이션은 스위퍼(주로 팀의 주장이었던 아르만도 피키)와 4명의 대인 방어 수비수를 포함했다.[10] 그는 볼 점유율을 중시하는 축구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공은 선수가 없을 때 더 멀리, 더 빠르게 움직인다"고 말하며 효율성을 강조했다.[4]

에레라 전술의 핵심적인 혁신 중 하나는 풀백의 공격적인 활용이었다. 특히 왼쪽 풀백이었던 자친토 파케티를 윙백처럼 전진시켜 빠른 역습을 전개했다. 이는 리베로의 수비 지원을 받으며 이루어졌고, 이후 이탈리아 축구 전술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960년대 에레라의 '그란데 인테르'는 이러한 수직적인 축구와 매우 빠르고 효율적인 역습을 특징으로 했다.[12] 자친토 파케티타르치시오 부르니치 같은 빠르고 활동적인 풀백들은 수비 라인에서 벗어나 공격에 가담하며 상대 팀을 놀라게 했다.[12]

팀의 중원에서는 스페인 출신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루이스 수아레스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뛰어난 활동량, 기술, 시야,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팀이 공을 되찾는 데 기여하고, 전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풀백이나 공격수에게 정확한 롱 패스를 연결하여 빠른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12][13][14]

비록 에레라의 바르셀로나 시절은 유동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로 알려졌지만, 인테르에서의 카테나치오 전술은 득점이 적고 지루하며 지나치게 수비적이거나 파괴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5] 그러나 에레라와 당시 인테르 선수들은 이러한 평가에 반박했다.[5] 에레라는 "문제는 나를 따라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따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의 카테나치오에 포함된 공격적인 원칙들을 잊어버렸다. 나는 스위퍼로 피키를 기용했지만, 파체티도 있었다. 그는 공격수만큼 많은 골을 넣은 최초의 풀백이었다"고 항변했다.[11]

인테르는 에레라의 지휘 아래 1964년과 1965년에 연속으로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5]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의 카테나치오 스타일은 1967년 리스본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스코틀랜드의 셀틱에게 패배하며 큰 도전에 직면했다. 셀틱은 산드로 마촐라에게 이른 시간 페널티킥 골을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2-1 역전승을 거두었으며, 많은 전문가들은 이 결과를 수비적인 카테나치오에 대한 '축구의 승리'로 평가했다.[15][16][17][18]

4. 2. 심리전과 동기 부여

엘레니오 에레라는 선수들에게 심리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기술을 개척한 인물이다.[28][29] 그가 남긴 유명한 어록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데, 대표적으로 "전력을 다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그의 팀이 10명으로 싸워야 했을 때 남긴 "10명의 팀플레이가 11명보다 낫다", 그리고 "탁월함 + 준비 + 지능 + 활동성 = 우승" 등이 있다.[28][29] 이러한 문구들은 경기장 광고판에 게시되었고, 선수들은 훈련 중 구호로 외치기도 했다.[28][29]

에레라는 엄격한 규율을 통해 선수단을 관리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음주와 흡연을 금지했으며, 식단과 체중 관리에도 신경 썼다.[28][29] 인테르 시절, 한 선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로마에 이기러 왔다" 대신 "로마에 경기하러 왔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출전시키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28][29] 또한 선수들의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클럽 직원을 보내 선수들의 집에서 '취침 점호'를 하기도 했으며,[28][29] 경기 전에는 선수들을 외딴 지역의 호텔(ritiro|리치로ita)에 소집하여 목요일부터 일요일 경기를 준비하는 방식을 도입했다.[28][29]

그는 관중을 "12번째 선수"라고 부르며 팬들의 지지를 강조한 최초의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는 간접적으로 1960년대 후반 울트라스 운동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28][29]

에레라는 팀의 경기력 자체로 주목받은 첫 번째 감독이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처럼 선수들이 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1960년대의 인테르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로 불릴 만큼 감독의 존재감이 컸다.

4. 3. '12번째 선수'와 팬

그는 관중들을 '12번째 선수'라고 칭한 최초의 감독들 중 하나이다. 간접적이긴 하지만, 이는 1960년대 후반에 초기 서포터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게끔 이끌었다.

5. 유산 및 평가

엘레니오 에레라는 선수들의 정신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전력을 다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10명의 팀플레이가 11명보다 낫다.", "탁월함 + 준비 + 지능 + 활동성 = 우승"과 같은 그의 유명한 말들은 경기장 광고판에 게시되었고, 선수들은 이를 구호처럼 외쳤다.

또한 그는 선수들에게 매우 엄격한 규율을 적용했다. 술과 담배를 금지하고 선수들의 체중까지 관리하려 했다. 한 선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로마에 이기러 왔다" 대신 "로마에 경기하러 왔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은 일화도 있다. 선수들의 사생활 관리에도 신경 써서 클럽 직원들이 직접 선수들의 집을 방문해 취침 시간을 확인하기도 했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는 목요일부터 일요일 경기까지 선수들과 함께 외딴 호텔에서 합숙하며 경기를 준비했다.

에레라는 관중을 '12번째 선수'라고 부른 최초의 감독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이는 1960년대 후반 초기 서포터 문화가 형성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의 대표적인 전술인 '카테나치오'는 수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단순히 수비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풀백, 특히 자친토 파케티와 같은 선수를 공격적인 윙백처럼 활용했으며, 수비 시에는 스위퍼가 이들을 지원하며 빠른 역습을 전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전술은 이후 이탈리아 축구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에레라 자신도 자신의 팀이 수비에만 의존한다는 평가를 강하게 부정했다.

에레라는 팀의 경기력을 통해 감독 자신이 주목받게 된 첫 번째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처럼 뛰어난 선수들이 팀의 중심으로 여겨졌지만, 1960년대의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엘레니오 에레라의 인테르'라고 불릴 정도로 감독의 역할과 위상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기자들은 그의 뛰어난 성공과 전술적 능력, 그리고 때로는 대담하게 경기 결과를 예측하고 이를 맞추는 모습 때문에 그에게 Il Mago|일 마고ita(마법사) 또는 그의 이름 앞글자를 딴 'H.H.'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10][19]

2004년에는 그의 미망인 피오라 간돌피가 에레라의 생전 노트와 일기에 담긴 스케치와 메모 등을 모아 Tacalabala|타칼라발라ita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28][29]

6. 수상 경력

엘레니오 에레라는 감독으로 활동하며 총 16개의 주요 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클럽대회우승 연도/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프리메라리가1949-50, 1950-51
코파 에바 두아르테[30]1950
합계3회
FC 바르셀로나프리메라리가1958-59, 1959-60
코파 델 레이1958-59, 1980-81
인터시티스 페어스컵1958-60
합계5회
인테르나치오날레세리에 A1962-63, 1964-65, 1965-66
유러피언컵1963-64, 1964-65
인터콘티넨털컵1964, 1965
합계7회
AS 로마코파 이탈리아1968-69
합계1회
총합16회


6. 1.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6. 2. FC 바르셀로나

6. 3.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FC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 엘레니오 에레라는 1960년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인테르나치오날레와 계약을 맺고 1968년까지 팀을 이끌었다.[5] 이 기간 동안 그는 5–3–2 포메이션을 사용했으며, 카를 라판의 ''Verrou'' (도어 볼트) 전술을 수정하여 역습에 더 큰 유연성을 부여한 ''카테나치오''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

에레라의 지휘 아래 인테르는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이 시기의 팀은 '위대한 인테르'(Grande Inter|그란데 인테르it)로 불렸다. 이 기간 동안 인테르는 세리에 A 3회 우승(1962-63, 1964-65, 1965-66),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연속 우승(1964-65, 1965-66), 그리고 인터콘티넨털컵 2회 우승(1964, 1965)을 달성하는 위업을 세웠다.[5][6][7] 에레라는 인테르 재임 중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1959-1962)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1966-1967) 감독을 겸임하기도 했다.[5]

1968년, 에레라는 AS 로마로 팀을 옮기며 인테르에서의 첫 번째 감독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1973–74 시즌에 인테르 감독으로 잠시 복귀하기도 했다.

6. 4. AS 로마

참조

[1] 웹사이트 Greatest Managers, No. 5: Herrera http://www.espnfc.co[...] ESPN FC 2015-02-07
[2] 간행물 Helenio Herrera: Perfector of Catenaccio and Architect of La Grande Inter https://punditfeed.c[...] 2020-04-07
[3] 간행물 Throwback Thursday: Helenio Herrera, The Wizard of Grande Inter https://cultofcalcio[...] 2020-06-03
[4] 웹사이트 The incomparable legacy of Helenio Herrera http://thesefootball[...] 2015-12-17
[5] 뉴스 Obituary: Helenio Herrera – Obituaries, News https://www.independ[...] 2011-04-22
[6] 웹사이트 Profilo: Helenio Herrera https://it.uefa.com/[...] UEFA.com 2020-05-22
[7] 웹사이트 Helenio Herrera: The Innovator Who Single-Handedly Changed the Beautiful Game https://www.si.com/s[...] Sports Illustrated 2020-05-22
[8] 웹사이트 Fiora Gandofi – books http://www.fioragand[...] Fioragandolfi.it 2011-04-22
[9] 웹사이트 Herrera's creative engine room: God, Freud and Yoga – Professor Champions League http://fourfourtwo.c[...] FourFourTwo 2011-04-22
[10] 웹사이트 La Grande Inter: Helenio Herrera (1910-1997) – "Il Mago" http://www.sempreint[...] Sempre Inter 2014-09-10
[11] 웹사이트 Arrigo Sacchi is right, only Italy accepts defensive football {{!}} IFD http://www.italianfo[...]
[12] 웹사이트 Helenio Herrera: More than just catenaccio https://www.fifa.com[...] FIFA.com 2014-09-10
[13] 웹사이트 Great Team Tactics: Breaking Down Helenio Herrera's 'La Grande Inter' http://bleacherrepor[...] Bleacher Report 201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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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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